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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58

골목길 - 정호승

골목길 - 정호승  그래도 나는 골목길이 좋다서울 종로 피맛골 같은 골목길 보다도시 변두리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블럭담이 이어져 있는 산동네의정부 수락산 밑 천상병시인의 집이 있던 그런 골목길이 좋다담 밑에 키 큰 해바라기가 서 있고개똥이 하늘을 쳐다보다가소나기에 온몸을 다 적시는 그런 골목길이 좋다내 어릴때 살던 신천동 좁은 골목길 처럼전봇대 하나 비스듬히 하나 서 있고길 모퉁이에 낡은 구멍가게 하나쯤있으면 더 좋다주인 할머니가 고양이 처럼 졸다가부채를 부치다가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냐고라면 몇개 건네주는 그 가난의 손끝은 얼마나 소중한가늦겠다고 어서 다녀오라고너무 늦었다고 어서 오라고 안아주던 어머니의 그리운 손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술꾼이 노상방뇨하고 지나가는 내 인생의 골목길이..

시,좋은글 2024.11.08

마음의 사막 - 정호승

마음의 사막 - 정호승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나간다낙타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지는 오래다별똥은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저리도 황급히 사라지고낙타는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평생을 무릎조차 펴지 못하는가다시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구 밖으로 떨어진다위경련을 일으키며 멀리 녹두꽃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머리맡에 비수 한자루를 들고 잠이 드는 사막의 밤초승달이 고개를 숙이고 시퍼렇게 칼을 갈고 앉아 있다인생은 때때로 기도 속에 있지 않다너의 영혼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 24.11.5.화. 정호승문학관 특강에서

시,좋은글 2024.11.07

영등포가 있는 골목​ - 정호승

영등포가 있는 골목​ - 정호승​영등포역 골목에 비 내린다노란 우산을 쓰고잠시 쉬었다 가라고 옷자락을 붙드는늙은 창녀의 등 뒤에도 비가 내린다행려병자를 위한 요셉병원 앞에는끝끝내 인생을 술에 바친 사내들이 모여또 술을 마시고비 온 뒤 기어나온 달팽이들처럼언제 밟혀 죽을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기어다닌다영등포여이제 더이상 술을 마시고병든 쓰레기통은 뒤지지 말아야 한다검은 쓰레기봉지 속으로 기어들어가홀로 웅크리고 울지 말아야 한다오늘밤에는저 백열등 불빛이 다정한 식당 한구석에서나와 함께 가정식 백반을 들지 않겠느냐혼자 있을수록 혼자 되는 것보다는혼자 있을수록 함께 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마음에 꽃힌 칼 한자루보다마음에 꽃힌 꽃 한송이가 더 아파서잠이 오지 않는다도대체 예수는 어디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가영등..

시,좋은글 2024.11.06

자작나무에게 - 정호승

자작나무에게 - 정호승  나의 스승은 바람이다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다나는 새의 제자가 된지 오래다일찍이 바람을 가르는 스승의 높은 날개에서 사랑과 자유의 높이를 배웠다 나의 스승은 나무다새들이 고요히 날아와 앉는 나무다나는 일찍이 나무의 제자가 된지 오래다스스로 폭풍이 되어폭풍을 견디는 스승의 푸른 잎새에서인내와 감사의 깊이를 배웠다 자작이여새가 날아오르기를 원한다면먼저 나무를 심으라고 말씀하신자작나무여나는 평생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했지만새는 나의 스승이다나는 새의 제자다

시,좋은글 2024.09.17

발자국 - 정호승

발자국 - 정호승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듯이발자국도 따라가 별이 되는가내가 남긴 발자국에 핀 민들레는 해마다 별이 되어 피어나는가 내 상처에 길게 대못을 박고멀리 길가에 내 던져진 너의 손에는 길게 뿌리가 뻗어지금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울창하다 그 길가에 작은 수도원 하나 세워졌으면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하룻밤곤히 주무시고 가셨을 텐데주무시기 전에 나를 꼭 한번 안아주셨을 텐데 오늘도 내가 걸어간 길가엔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늘 나와 함께 걸어온핏물이 고인 발자국 하나

시,좋은글 2024.09.17

발자국 - 정호승

​발자국 - 정호승​​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남은 발자국들끼리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남은 발자국들끼리서로 뜨겁게 한 몸을 이루다가녹아버리는 것을 보면​​​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좋은글 2024.09.17

나무 그림자 - 정호승

나무 그림자 - 정호승  햇살이 맑은 겨울날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 한그루가무심히 자기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가던 사람이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나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전화를 한다​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발을 구르고허공에 삿대질까지 하며나무 그림자를 마구 짓밟는다​나무 그림자는 몇번 몸을 웅크리며신음소리를 내다가사람 품에 꼭 껴안고 아무 말이 없다

시,좋은글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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