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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좋은글 591

나무, 날다 - 구석본

나무, 날다 - 구석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우우우우 우거지는 봄 상수리나무 정중앙에는 딱딱구리 집이 있고그 안에는 딱따구리알 서너 개은밀하게 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무는 하늘을 날기 위해먼저 가슴을 후벼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잎과 가지로 펄럭이다가부스러기로 떨어지는 한 생( 生) 의 껍질과부름켜에 화석으로 쌓여가는 고독의 나이테까지후벼내고 파내어 물관부 깊숙이너의 자궁이 되어 너를 품을 때눈부신 공중으로 날 수 있다는 것을상수리나무는 알았다 새가 하늘로 날아 오른다나무가 하늘로 날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황혼의 붉은 시간을 지나새 한 마리,상수리나무 몸 안 깊은 곳에 날개를 접는다 딱따구리,마침내 뿌리를 가졌다.

시,좋은글 2024.06.26

칼의 맛 - 이 희섭

칼의 맛 - 이 희섭  음식 속으로 수많은 칼자국이 박힌다칼자국은 혈관을 돌며 몸속에서골격과 근육을 키워낸다손과 얼굴, 사상도 만든다 나는 무수한 칼자국을 삼키며 자라왔다어머니의 칼날이 유년의 배고픔을 씻어냈고누나의 칼질이 사춘기 격정을 도려냈다그녀을 만난 이후로나는 그녀의 도마 위에 오른 칼맛에 길들었다 오래도록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를 사육해 왔다혀끝에 비릿한 칼내음칼맛에 나는 오장육부를 베인다   잘리는 살점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없다면단면으로 배어 들어가는 칼의 맛을 어찌 알겠는가상처가 맛을 내는 것이다.

시,좋은글 2024.06.26

접목(接木) - 정용주

접목(接木) - 정용주  사선으로 단칼이 지나간다 대가리를 부정하는 몸과뿌리를 지워버린 기억이허공에서 맞댄다 선혈 낭자한 실핏줄친친 동여맨다 굴욕의 문서를 찢고새롭게 태어나라고반의 세계는 매일 죽어간다 부정을 부정하기 위해온힘으로 결합하는두 개의 부정 뱀에서 악어가 태어나고양에서 늑대가 생겨난다 나는 매일 죽으며 변종이 되어 간다 -2016년 12월호

시,좋은글 2024.06.26

외진 곳 - 허영만

외진 곳 - 허영만  잠실나루역에서 택시를 탔지아산병원으로 가주세요출발하여 가다가 기사님이 물었어동관이요? 서관이요?아 참, 장례식장이라고 답했어기사님이 말했지손님께 장례식장은 물어보지 않는다고순간, 기가 막힌 배려라고 답했어동관도 서관도 아닌 장례식장은 그 병원에서 밖으로 나가기 좋은 외진 곳에 있었어죽은 사람 만나러 가는 길도죽은 사람 영구차로 떠나는 길도저승으로 가기 좋은 길목이라는 듯 말이야맞아, 대형병원 장례식장은 다 외진 곳에 있어멀리 가는 길, 좀 더 빨리 가라는 배려일 터이지만 혹시 그거 알아?외진 곳은 어디나 어둡고 쓸쓸한 곳이라는 거살아있는 사람의 눈물이 고인 곳이라는 거  - 24년 봄호에서

시,좋은글 2024.06.26

오독(誤讀) - 구석본

오독(誤讀) - 구석본  TV자막에서 '문장'을 '분장','산을 오른다'를 '신을 오른다'로 '성매매'를 '정매매'로'사건'을 '시간'으로 읽었다 오독이었다 가을날수목원 개옻나무에 걸린 명패에서'수액(樹液)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를 '추억(追憶)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로 읽는다. 오독이다. '고목나무'를 '고독나무'로 읽은 날,비로소 알았다.오독이 아니라 그대 떠나간텅 빈 마음에서 울려온 말씀인 것을. 이 가을 수목원에는 고독나무가 불게 물들어가고 있다.

시,좋은글 2024.06.26

카멜레온 - 김화순

카멜레온 - 김화순 그의 눈길 앞에서 나는 재빨리 보호색을 띤다어깨는 유혹하듯 화려하게 부풀고얼굴은 재빠르게 풍경을 복사한다흐트러진 옷매무새 재빠르게 여미고두 다리에 불끈 힘을 주고또 하나의 나를 무수히 복제한다피카소의 그림처럼 사방으로 흩어진윗몸과 아랫도리가 빠르게 자리를 잡는다숨소리마저 온화하게 바꾸는 변신술팽칡넝쿨에 칭칭 감긴 고사목처럼시선에 꽁꽁 묶인 나는숨 막히는 생존법을  실행한다팽팽한 창살에 갇힌 나꿈에서라도 꼭꼭 여민 나를 완전히 벗어 보일 수 있을까판옵티콘에 수감된 무기수나는 죄목도 없이 형량을 산다 우리는 모두 감옥 하나씩 가지고 있다.

시,좋은글 2024.06.26

동물왕국 중독증 - 이면우

TV모니터 속에서 사자가 사슴을 먹고 있다바로 직전까지 도망치는 사슴을 사자가 쫓아다녔다나는 사슴이 사자 속으로 벌겋게 들어가는 걸 본다아니 저런, 꼭 제집 대문 들어가듯 하네 입이 문이면송곳니는 어서 들어가자고 등 떠미는 다정한 손아니지 지금 사슴이 사자로 변하는 중이잖아서로 꽉 붙들렸으니 영락없는 한 몸뚱어리지그렇게 한 순간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돌연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핏빛하늘 아래 사반나의 황혼 장엄하다어린 사슴 따뜻한 사자 뱃속에 들어간 황혼을 탁 끄고냉장고 열어 내용물 환히 비치는 유리그릇들어둑한 식탁위에 늘어놓다가 그 차가움에 감전되듯사슴이 사자에게 잡아먹힌 저녁의 정체를 비로소등줄기로 부르르 떨었다.

시,좋은글 2024.06.26

몸은 멀어져도 - 이상호

멀리 떨어져 있어도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거리로나를 따라 오는 것 같은 저 달 눈에서 멀어지면 맘에서도 멀어진다는딴 나라 사람들 생각은우리에겐 잘 맞지 않는 옷 몸이 멀어지면 그리움이 냉큼 달려와서맘이 멀어지지 않도록 다독이는데그 인력을 어찌 막을 수 있으리! 멀리 있어도어디서나 똑같이 보이는저 달처럼 그대 어디에 있든내 맘은 자석이 되어그대의 자장안에 있으리! -시집

시,좋은글 2024.06.26

넝쿨 - 조향순

화단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겁 없는 청춘들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앞장선 것은 양다래나무인데그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보자보자하니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단풍나무 그늘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더덕도 살금살금 팔을 들어 올립니다나팔꽃도 배슬배슬 웃으며 동조를 하고어디서 굴러 들어온 메꽃도 덩달아 옳소옳소합니다담쟁이는 미미 담장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말리지 않아도 됩니다가을철 들면 철이 들 것입니다하늘은 없다는 것, 허공에 헛손질했다는 걸 알고노랗게 질리거나 벌겋게 화를 내며 내려앉을 것입니다지켜만 보던 뿌리에 얼굴을 묻고 흐느낄 것입니다.                    22년 가을호

시,좋은글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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