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몸 - 이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주름살 많은한 부채 속, 바람 접혀 있듯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 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구석에 쿡, 쳐 박혀 봐야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를 들이미는 사이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더 망칠것 없다는 듯온몸으로 불길을 연다 구겨진 몸이 불을 살릴 줄 안다. 시,좋은글 2024.06.26
줄장미 - 이화은 입술이 새빨간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손톱이 긴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뽀족 구두를 신은 여자는 다 첩인 줄 알았다 녹슨 시간의 철조망을 아슬아슬 건너고 있는 아버지의 무수한 여자들 시,좋은글 2024.06.26
초승달 - 유미희 캠프 간 날까만 하늘 칠판에빛나는노란 괄호 한 쪽을 보았다. 나머지 한 쪽은누가 지웠나? 괄호 속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눈으로 채우고 써 보다가밤 꼴딱 샜다. 시,좋은글 2024.06.25
뭉클한 것 - 정해영 세 살 된 아이가울고 있다 막대사탕을 주어도토끼 인형을 안겨주어도발버둥을 치고 있다 말 대신 울음이다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점점 크게 들려오는데 엄마는말없이 등을 내밀어아기를 업는다 앉을 때도 같이 앉고화장실도 같이 가고다림질도 같이 한다 원래 한 몸이었던 둘 작은 심장이 둥글고 뭉클한 원적( 原籍)에 닿았는지 뚝 울음을 그친다 틈 없는 밀착소리를 죽인더 큰 진동이 오래아기를 흔들고 있다. -2022년 가을호 시,좋은글 2024.06.25
웃는 기와 - 이봉직 옛 신라 사람들은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 기와 하나가처마 밑으로 떨어져얼굴 한 쪽이금 가고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나뭇잎 뒤에 숨은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 번 웃어 주면천 년을 가는그런 웃음 남기고 싶어웃는 기와 흉내를 내 봅니다. 시,좋은글 2024.06.25
바위꽃 - 강순애 틈새로 들어온 씨앗오롯이 품어 뿌리를 받아 내리고줄기를 받혀 올렸다 새노란 돌양지꽃이 피었다고 단단한 몸에서 바위도 틈이 나면 꽃을 피운다. 시,좋은글 2024.06.25
물의 베개---박성우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시,좋은글 2024.01.25
육탁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 시,좋은글 2024.01.25
업어준다는 것--- 박서영 업어 준다는 것 ----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 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중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 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 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 드는 것 같다 시,좋은글 2024.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