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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좋은글 562

넝쿨 - 조향순

화단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겁 없는 청춘들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앞장선 것은 양다래나무인데그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보자보자하니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단풍나무 그늘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더덕도 살금살금 팔을 들어 올립니다나팔꽃도 배슬배슬 웃으며 동조를 하고어디서 굴러 들어온 메꽃도 덩달아 옳소옳소합니다담쟁이는 미미 담장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말리지 않아도 됩니다가을철 들면 철이 들 것입니다하늘은 없다는 것, 허공에 헛손질했다는 걸 알고노랗게 질리거나 벌겋게 화를 내며 내려앉을 것입니다지켜만 보던 뿌리에 얼굴을 묻고 흐느낄 것입니다.                    22년 가을호

시,좋은글 2024.06.26

구겨진 몸 - 이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주름살 많은한  부채 속, 바람 접혀 있듯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 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구석에 쿡, 쳐 박혀 봐야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를 들이미는 사이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더 망칠것 없다는 듯온몸으로 불길을 연다 구겨진 몸이 불을 살릴 줄 안다.

시,좋은글 2024.06.26

뭉클한 것 - 정해영

세 살 된 아이가울고 있다 막대사탕을 주어도토끼 인형을 안겨주어도발버둥을 치고 있다 말 대신 울음이다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점점 크게 들려오는데 엄마는말없이 등을 내밀어아기를 업는다 앉을 때도 같이 앉고화장실도 같이 가고다림질도 같이 한다 원래 한 몸이었던 둘 작은 심장이 둥글고 뭉클한 원적( 原籍)에 닿았는지 뚝 울음을 그친다 틈 없는 밀착소리를 죽인더 큰 진동이 오래아기를 흔들고 있다. -2022년 가을호

시,좋은글 2024.06.25

물의 베개---박성우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시,좋은글 2024.01.25

육탁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

시,좋은글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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