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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맛 - 이 희섭

소소한 소선생 2024. 6. 2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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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맛 - 이 희섭

 

 

음식 속으로 수많은 칼자국이 박힌다

칼자국은 혈관을 돌며 몸속에서

골격과 근육을 키워낸다

손과 얼굴, 사상도 만든다

 

나는 무수한 칼자국을 삼키며 자라왔다

어머니의 칼날이 유년의 배고픔을 씻어냈고

누나의 칼질이 사춘기 격정을 도려냈다

그녀을 만난 이후로

나는 그녀의 도마 위에 오른 칼맛에 길들었다

 

오래도록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를 사육해 왔다

혀끝에 비릿한 칼내음

칼맛에 나는 오장육부를 베인다

 

 

 

잘리는 살점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없다면

단면으로 배어 들어가는 칼의 맛을 

어찌 알겠는가

상처가 맛을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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