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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 52

양철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리다, 라고 쓰면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삶이란,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빗소리였으나보이지 않기 때문에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날아가지 않으려고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쉽게 꺼내지 말 것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 않겠다,라든지그래, 우..

시,좋은글 2024.08.29

항아리 - 문태준

항아리 - 문태준   내게는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지난봄에 동백나무 아래 놓아두었습니다 항아리는 멀뚱멀뚱 앉아 있습니다 어두워져도 날이 어두워진 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항아리는 제 몸에 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그제는물 괸 항아리의 수면에 살얼음이 얹혀 있었는데 오늘은 날이 풀려 잔잔하게 물결이 흐릅니다 나는 조용하게 일어나는 그 맑은 물결 같은 말씀을 기다려 항아리 옆에 앉아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는 산까치 한마리가 항아리에 앉아 있다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전날에는 가랑잎의 말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훨씬 전날에는 일어난 구름,사랑, 실바람과 풍설(風說),질긴 장마,무서리, 그리고 동백꽃이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네 사람이 내 집에 찾아와서..

시,좋은글 2024.08.29

부엌 - 이경림

부엌 - 이경림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 왔다그녀는 소리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쪽으로 갔다.인기척에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큰일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얘야 세상에! ..

시,좋은글 2024.08.29

볍씨 말리는 길 - 고영민

볍씨 말리는 길 - 고영민  집밖을 나섰습니다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랗게 펴 말린 볍씨들이 가지런합니다.햇살에선 오래된 볏집냄새가 풍기고 마을은 이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참 오랜만의 휴식입니다. 이런 날은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이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선 볍씨들의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런 볍씨 속에 들어있는 흰쌀, 영혼들.나는 문득 저 길의 끝, 일년 내낸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정갈한 저녁 밥상을 떠올립니다. 텅 빈 무논 한가운데 흰 백로가 허리를 구부려마음 자락에 떨어진 이삭 하나를 줍습니다.이 역시 소담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쌀밥입니다. 그림자를 길게 펼쳐놓고출출한 햇살 한줄기가 볍씨 하나하나를 오랫동안 어루만집니다.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널어놓은 ..

시,좋은글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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