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좋은글

항아리 - 문태준

소소한 소선생 2024. 8. 2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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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 문태준

 

 

 

내게는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지난봄에 동백나무 아래 놓아두었습니

다 항아리는 멀뚱멀뚱 앉아 있습니다 어두워져도 날이 어두워진 줄 모르고 앉

아 있습니다 항아리는 제 몸에 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그제는

물 괸 항아리의 수면에 살얼음이 얹혀 있었는데 오늘은 날이 풀려 잔잔하게 물

결이 흐릅니다 나는 조용하게 일어나는 그 맑은 물결 같은 말씀을 기다려 항아

리 옆에 앉아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는 산까치 한마리가 항아리에 앉아 있

다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전날에는 가랑잎의 말들이 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훨씬 전날에는 일어난 구름,사랑, 실바람과 풍설(風說),

질긴 장마,무서리, 그리고 동백꽃이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

다 동네 사람이 내 집에 찾아와서는 항아리 속이 궁금해 들여다보다 그만 수

면 아래로 얼굴이 아주 들어가고 만 일도 있었습니다 항아리는 제 몸속으로 들

어간 이들의 명부(名簿)를 갖고 있지마 그마저도 가라앉혀놓았으니 그 이름들

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나는 오늘 항아리 옆에 앉아 항아리처럼 입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 아, 아, 탄복하는 소리도 내고 내 갑갑한 속을 떠올려 응아응아,

우는 소리도 냅니다 그래도 항아리는 한 말씀도 없으시니 나를 항아리에 쏟아

붓습니다만, 늘 그러하듯 제 몸에 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앉아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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