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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 이경림

소소한 소선생 2024. 8. 2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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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 이경림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

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 왔다

그녀는 소리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쪽으로 갔다.인기척에

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 큰일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 얘야 세상에! 부엌이 없는 곳이 어디 있니?어디나 부엌은 있지 저기 보렴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비스듬히 열렸잖니!

- 저긴 부엌이 아니에요 복도예요

- 그래? 언제 부엌이 복도가 되었단 말이냐?

-  밖으로 나갔어요. 엄마, 밥 따윈 이제 아무도 안 해요 보세요. 저기 줄줄이 걸어나가는 여자들을요

- 깔깔깔(그녀는 정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배를 움켜 쥐고 웃었다)

얘야. 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

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된장 끊이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 엄마 제발 정신 차리세요 여긴 병원이란 말예요

- 계집애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게 아니란다. 아버지 화나시겠다 어여 밥하러 가자 아이구 얘

야. 숨이 이렇게 차서 어떻게 밥을 하니?(모기만한 소리로)누가 부엌으로 가는 길에 저렇게 긴 복도를

만들었을까?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오래 걸어 부엌으로 갈까?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

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

                  상자들(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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