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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리다, 라고 쓰면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삶이란,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빗소리였으나보이지 않기 때문에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날아가지 않으려고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쉽게 꺼내지 말 것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 않겠다,라든지그래, 우..

시,좋은글 2024.08.29

항아리 - 문태준

항아리 - 문태준   내게는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지난봄에 동백나무 아래 놓아두었습니다 항아리는 멀뚱멀뚱 앉아 있습니다 어두워져도 날이 어두워진 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항아리는 제 몸에 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그제는물 괸 항아리의 수면에 살얼음이 얹혀 있었는데 오늘은 날이 풀려 잔잔하게 물결이 흐릅니다 나는 조용하게 일어나는 그 맑은 물결 같은 말씀을 기다려 항아리 옆에 앉아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는 산까치 한마리가 항아리에 앉아 있다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전날에는 가랑잎의 말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훨씬 전날에는 일어난 구름,사랑, 실바람과 풍설(風說),질긴 장마,무서리, 그리고 동백꽃이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네 사람이 내 집에 찾아와서..

시,좋은글 2024.08.29

부엌 - 이경림

부엌 - 이경림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 왔다그녀는 소리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쪽으로 갔다.인기척에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큰일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얘야 세상에! ..

시,좋은글 2024.08.29

볍씨 말리는 길 - 고영민

볍씨 말리는 길 - 고영민  집밖을 나섰습니다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랗게 펴 말린 볍씨들이 가지런합니다.햇살에선 오래된 볏집냄새가 풍기고 마을은 이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참 오랜만의 휴식입니다. 이런 날은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이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선 볍씨들의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런 볍씨 속에 들어있는 흰쌀, 영혼들.나는 문득 저 길의 끝, 일년 내낸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정갈한 저녁 밥상을 떠올립니다. 텅 빈 무논 한가운데 흰 백로가 허리를 구부려마음 자락에 떨어진 이삭 하나를 줍습니다.이 역시 소담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쌀밥입니다. 그림자를 길게 펼쳐놓고출출한 햇살 한줄기가 볍씨 하나하나를 오랫동안 어루만집니다.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널어놓은 ..

시,좋은글 2024.08.29

곡비 - 문정희

곡비 -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곡을 팔고 다니던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고 살았다그녀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 먹으며까무러질 듯 울어대는 곡소리에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옥례 엄마 머리 위에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알아야 하리

시,좋은글 2024.08.29

나무 - 곽재구

나무 - 곽재구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나무 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나무와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시,좋은글 2024.08.28

따뜻한 편지 - 곽재구

따뜻한 편지                          곽재구 당신이 보낸 편지는언제나 따뜻합니다.물푸레나무가 그려진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보낸이와 받는 이도 없는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잇꽃으로 물들인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그럴 때면 내게 님은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꽃이 피고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데버리지 못하는 지상의 꿈들로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시,좋은글 2024.08.28

은행나무 - 곽재구

은행나무                                               곽재구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누군가 깊게 사랑해온 사람들을 위해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누군가의 옛추억들 읽어가고 있노라면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개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희망 ..

시,좋은글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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