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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좋은글 562

어떤 오후 - 전재분 제4시집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가끔씩 싸한 바람이 든다 ​ 헹한 가슴 스산한 가을바람 같다가 때로는 봄을 밀쳐내는 동백꽃처럼 붉어지는 ​ 길을 가다가 꽃무늬 스카프 한 장을 골랐다 주름진 목을 감고 목청껏 소리치고 싶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 마음은 깊고 푸른 청춘 아직도 목마름 많아 설레는 가슴인데 ​ 봄이 오면 다시 피어 누구의 꽃이 되고 싶다 ​ 꿈이 있는 여인은 청춘이라 했던가 아름답다 했던가

시,좋은글 2021.08.04

적어두기 - 김경미

손바닥에 적어둔다 ​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 못 쓰고 버려야 하는데 찾지 못해 못 버릴까봐 ​ 선량과 기쁨의 위치를 침착과 짜증의 위치를 가야 할 곳과 가고 싶은 길의 위치를 ​ 우는 소리만 하는 목소리와 깊은 생각과 유머가 담긴 목소리의 주인을 ​ 인간성 좋은 사람이 잘 먹는 음식과 천재가 잘 가는 음식점 위치를 ​ 귀갓길나무들에게도 적어둔다 이 하루가 다 누구 덕분인지 ​

시,좋은글 2021.08.04

세 켤레의 짐 - 김경미

내겐 아끼는 신발이 세 켤레 있다 ​ 첫 번째 신은 아주 가벼워서 걸음도 저절로 가볍고 경쾌해진다 ​ 그러나 조금 멀리 걸을 땐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불편하다 그럴 때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두번째 신발이 좋다 ​ 세 번째 신발은 무겁다 신고 나서 일이십 분은 발이 신발을 들고 가듯 힘겹다 그러나 험한 산에 오를수록 그 무거운 등산화가 가장 가볍고 든든해진다 ​ 내겐 그 세 컬레의 신발같이 ​ 가벼워서 좋은 짐 무거워서 좋은 짐 무게 다른 짐 또한 세 개가 있다 아끼는 지 세 개가

시,좋은글 2021.08.04

가을의 요일들 - 김경미

가을의 월요일은 뭐든 제대로 만들려는 맨드라미처럼 오고 ​ 가을의 화요일은 겹겹이 빽빽한 손길을 모은 국화처럼 오고 ​ 가을의 수요일은 입에 써서 몸에 좋은 쑥부쟁이 구절초처럼 오고 ​ 목요일과 금요일은 작은 흔들림으로 산과 들과 바다를 뒤흔드는 갈대와억새, 코스모스와 강아지풀로 오고 ​ 가을의 토, 일요일은 가을의 일주일을 수수 억만 번 지켜온 높고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서 날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처럼 오네

시,좋은글 2021.08.04

나팔꽃 단상 - 손수진

밤마다 이슬 밟고 다닌다는 소문, 달고 사는 여자를 낮이면 풀이 죽고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는 숙기 없는 그 여자를 어느 별 총총한 밤 숨어서 따라가 본 적 있는데요. 쓰르라미 우는 작은 언덕을 지나 송전탑 아래서 걸음을 멈추더니 보르르한 콩꽃 같은 신발, 이름 없는 묘 옆에 벗어놓고 글쎄, 송전탑을 기어오르지 않겠어됴.말릴 겨를도 없이, 차가운 철탑을 움켜잡은 손가락이 얼마나 바들바들 떨리던지 하마터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끌어내릴 뻔 했지 뭐겠어요 그녀는 밤새 철탑을 감고 오르더니 새벽이 되자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ㅇ 세상에, 어디에 그런 뜨거운 것을 숨기고 살았는지 몸에서 화난 꽃을 저 혼자 피우고 있었는데요. 햐! 만일 피 뜨거운 사내였으면 어쩔 뻔 했겠어요.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을..

시,좋은글 2021.08.04

나무-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려야한다는 것을 사람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

시,좋은글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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