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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달이 있는 풍경 - 서지월

구부정한 바지랑대 위에 낮달 하나 걸려 있다. 바람도 풀밭으로 가 엎드린 시간 채송화 꽃밭에는 졸음오는 맨드라미 피가 달아 ​ 아버지의 나귀 방울 소리는 감투봉을 넘었는지 들리지 않고 동구밖 미루나무 꼭대기엔 흰 배때아리 드러낸 까치 한 쌍. 무어라 꽁지 흔들며 알아듣지 못하는 말시늉을 건넨다. ​ 한참을 이고 섰던 광주리 내려놓듯 댓돌 위 신발 한 켤레 벗어놓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 끙끙 앓으신다. ​ 구부정한 바지랑대 위 낮달 하나 걸려 오도가도 못하듯 마당가엔 지심 매던 엄마의 호미 한 자루 드러누워 있다. ​ 나는 부엌으로 가 풍로에 불지펴 약탕기에 탕약을 끓이고 있다. ​

시,좋은글 2021.08.16

구두끈을 매는 남자- 심재휘

서소문 코오롱 빌딩 앞 횡단보도 낡은 신호등이 오늘은 먹통이다 명멸의 일생이 잠시 눈을 감는 동안 잰걸음으로 비둘기 한 마리 밥집 골목으로 들어간다 희미해진 횡단보도를 사람들이 슬금슬금 건너는 도심의 점심시간 눈이 한바탕 올 듯한 날씨에 하늘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사라진 꿈들이 서글프게 흩날리기 시작한다 좁은 하늘 그 놓은 곳에서 이 넓은 거리를 자꾸 내려다 보는 이는 누구인가 횡단보도 한쪽 끝 사내 하나가 허리 굽혀 풀어진 구두 끈을 매고 있다 한껏 동여맨다 오늘따라 구두끈에 묶인 가족이 눈발에 춥다.

시,좋은글 2021.08.15

강 - 이성복

잎 떨군 나무드의 그림자가 길게 깔리면서 푸르름이 가시지 않은 땅은 적쇠에 그을은 스테이크 같았다 처 음엔 딸기나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 하우스 길게 뻗 친 허연 비닐 지붕인 줄 알았다 미안하다 눈 덮인 겨 울이면 땅의 탯줄처럼 한없이 늘어나 우리들 속옷 속 덜아문 배꼽까지 닿아 있던 강이며, 둘이서 담배 한 대 피우는 사이 풀풀풀 떡가루 같은 눈을 쓸어올리며 너는 방패연의 긴긴 꼬리처럼 단숨에 떠오를 것 같았 다 아니다 다시 칼바람 잦아들면 강은 눈썹 끝까지 옥양목 홑이불 끌어올리며 자던 어린 날의 늦잠이거나 내장이 다 터진 어떤 삶을 덮어 가리던 수의였다.

시,좋은글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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