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시,좋은글 562

바람의 말 - 마종기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참을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시,좋은글 2024.09.04

오래된 물음 - 김광규

오래된 물음 -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시간이 흐르면꽃은 시들고나뭇잎은 떨어지고짐승처럼 늙어서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보아라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볼품없는 밤송이 선이장이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 낸밝은 꽃 한 송이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연꽃의 환한 모습그리고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더욱 다황하게 만들지 않느냐맨발로 땅을 디딜까봐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신발을 신기고손에 흙이 묻으면더럽다고 털어준다도대체땅에 뿌리박지 않고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튀어오르는 ..

시,좋은글 2024.09.04

양철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리다, 라고 쓰면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삶이란,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빗소리였으나보이지 않기 때문에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날아가지 않으려고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쉽게 꺼내지 말 것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 않겠다,라든지그래, 우..

시,좋은글 2024.08.29

항아리 - 문태준

항아리 - 문태준   내게는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지난봄에 동백나무 아래 놓아두었습니다 항아리는 멀뚱멀뚱 앉아 있습니다 어두워져도 날이 어두워진 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항아리는 제 몸에 물이 넘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그제는물 괸 항아리의 수면에 살얼음이 얹혀 있었는데 오늘은 날이 풀려 잔잔하게 물결이 흐릅니다 나는 조용하게 일어나는 그 맑은 물결 같은 말씀을 기다려 항아리 옆에 앉아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는 산까치 한마리가 항아리에 앉아 있다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전날에는 가랑잎의 말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훨씬 전날에는 일어난 구름,사랑, 실바람과 풍설(風說),질긴 장마,무서리, 그리고 동백꽃이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네 사람이 내 집에 찾아와서..

시,좋은글 2024.08.2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