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두기 - 김경미 손바닥에 적어둔다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 못 쓰고 버려야 하는데 찾지 못해 못 버릴까봐 선량과 기쁨의 위치를 침착과 짜증의 위치를 가야 할 곳과 가고 싶은 길의 위치를 우는 소리만 하는 목소리와 깊은 생각과 유머가 담긴 목소리의 주인을 인간성 좋은 사람이 잘 먹는 음식과 천재가 잘 가는 음식점 위치를 귀갓길나무들에게도 적어둔다 이 하루가 다 누구 덕분인지 시,좋은글 2021.08.04
오늘의 제빵- 김경미 오늘의 제빵 - 김경미 빈 겨울 나뭇가지들을 위해서 초록나뭇잎을 굽고 텅 빈 들판을 위해서 벼와 보리를 굽는다 흐려지는 하늘을 위해서는 흰 눈꽃을 굽고 세상에서 제일 작은 철새 상모솔새를 위해서는 중간중간 쉬어가라고 휴게소 같은 빵조각들을 길에 뿌려준다 빵을 굽는 건 따뜻한 연약을 만드는 일 시,좋은글 2021.08.04
낙엽오르골 - 김경미 벽에 걸어둔 액자 옮기다가 옆의 오르골을 떨어뜨렸다 나뭇잎 납작하게 압착해 넣은 투명오르골이 진짜 낙엽이 됐다 살아나지 못하겠구나 어느 한 귀퉁이든 박살났을 낙엽을 주워들었는데 낙엽이 살아 있엇다 부서지고도 노래하는 악기 죽어서도 사는 낙엽이었다 시,좋은글 2021.08.04
세 켤레의 짐 - 김경미 내겐 아끼는 신발이 세 켤레 있다 첫 번째 신은 아주 가벼워서 걸음도 저절로 가볍고 경쾌해진다 그러나 조금 멀리 걸을 땐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불편하다 그럴 때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두번째 신발이 좋다 세 번째 신발은 무겁다 신고 나서 일이십 분은 발이 신발을 들고 가듯 힘겹다 그러나 험한 산에 오를수록 그 무거운 등산화가 가장 가볍고 든든해진다 내겐 그 세 컬레의 신발같이 가벼워서 좋은 짐 무거워서 좋은 짐 무게 다른 짐 또한 세 개가 있다 아끼는 지 세 개가 시,좋은글 2021.08.04
가을의 요일들 - 김경미 가을의 월요일은 뭐든 제대로 만들려는 맨드라미처럼 오고 가을의 화요일은 겹겹이 빽빽한 손길을 모은 국화처럼 오고 가을의 수요일은 입에 써서 몸에 좋은 쑥부쟁이 구절초처럼 오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작은 흔들림으로 산과 들과 바다를 뒤흔드는 갈대와억새, 코스모스와 강아지풀로 오고 가을의 토, 일요일은 가을의 일주일을 수수 억만 번 지켜온 높고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서 날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처럼 오네 시,좋은글 2021.08.04
나팔꽃 단상 - 손수진 밤마다 이슬 밟고 다닌다는 소문, 달고 사는 여자를 낮이면 풀이 죽고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는 숙기 없는 그 여자를 어느 별 총총한 밤 숨어서 따라가 본 적 있는데요. 쓰르라미 우는 작은 언덕을 지나 송전탑 아래서 걸음을 멈추더니 보르르한 콩꽃 같은 신발, 이름 없는 묘 옆에 벗어놓고 글쎄, 송전탑을 기어오르지 않겠어됴.말릴 겨를도 없이, 차가운 철탑을 움켜잡은 손가락이 얼마나 바들바들 떨리던지 하마터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끌어내릴 뻔 했지 뭐겠어요 그녀는 밤새 철탑을 감고 오르더니 새벽이 되자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ㅇ 세상에, 어디에 그런 뜨거운 것을 숨기고 살았는지 몸에서 화난 꽃을 저 혼자 피우고 있었는데요. 햐! 만일 피 뜨거운 사내였으면 어쩔 뻔 했겠어요.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을.. 시,좋은글 2021.08.04
나무-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려야한다는 것을 사람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시,좋은글 2021.08.04
나무의 철학- 조병화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그걸 사는 거다 봄,여름, 가을, 긴 겨울을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 쉼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시,좋은글 2021.08.04
나무 -조이스 킬머 나무같이 예쁜 시를 나는 다시 못 보리. 대지의 단 젖줄에 주린 입을 꼭 댄 나무 종일토록 하느님을 보며 무성한 팔을 들어 비는 나무 여름이 되면 머리털 속에 지경새 보금자리를 이는 나무. 가슴에는 눈이 쌓이고 비와 정답게 사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가 써도 나무는 하느님이 만드시나니 시,좋은글 2021.08.04
물컵의 신비 - 김경미 아들 셋에 딸 하나, 네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는 아이들이 물컵만 쏟지 않아도 살 것 같겠다며 그때만을 기다렸다 어느 날 부턴가 드듸어 네 아이 모두 다 더는 물컵을 쏟지 않았다 더는 물이 밟히지 않는 바닥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엄마는 너무 기뻐서 허둥대다가 그만 물컵을 쏟았다 시,좋은글 2021.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