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별- 정호승 사람이 다니는 눈길 위로 누더기가 된 낙엽들이 걸어간다 낙엽이 다니는 눈길 위로 누더기기가 된 사람들이 걸어간다 그 뒤를 쓸쓸히 개미 한 마리 따른다. 그 뒤를 쓸쓸히 내가 따른다 누더기기 되고 나서 내 인생이 편안해졌다 누더기가 되고 나서 비로소 별이 보인다 개미들도 누더기별이 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 시,좋은글 2021.08.15
구두끈을 매는 남자- 심재휘 서소문 코오롱 빌딩 앞 횡단보도 낡은 신호등이 오늘은 먹통이다 명멸의 일생이 잠시 눈을 감는 동안 잰걸음으로 비둘기 한 마리 밥집 골목으로 들어간다 희미해진 횡단보도를 사람들이 슬금슬금 건너는 도심의 점심시간 눈이 한바탕 올 듯한 날씨에 하늘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사라진 꿈들이 서글프게 흩날리기 시작한다 좁은 하늘 그 놓은 곳에서 이 넓은 거리를 자꾸 내려다 보는 이는 누구인가 횡단보도 한쪽 끝 사내 하나가 허리 굽혀 풀어진 구두 끈을 매고 있다 한껏 동여맨다 오늘따라 구두끈에 묶인 가족이 눈발에 춥다. 시,좋은글 2021.08.15
버려진 봄날 - 서경온 쓰러진 담장이 있엇다. 허물어진 우물가. 비가 새는 지붕 밑. 금이 간 아궁이가 보였다. 떨어져 나간 문짝. 텅 빈 외양간 옆이었다 온뭄으로 불 밝히고 서서 살구꽃 환하게 피어 있었다. 주인 떠난 집. 버려진 봄날의 아름다운 SOS. 눈부시게, 눈물겹게...... 손짓하고 있었다. 시,좋은글 2021.08.15
그때 보았다 - 신달자 어깨 늠름한 젊은 시절 주머니 두둑한 중년의 의젓한 모습에도 엿볼 수 없었어라 한 점 살까지 마음까지 완연 육탈한 다만 순종 두 글자의 뼈로 누운 형해의 끝 그때 보았다 오직 두 눈에 넘치는 맑은 섬광 딸이 처음 본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아버지 시,좋은글 2021.08.15
그리움 - 이용악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시,좋은글 2021.08.15
강 - 이성복 잎 떨군 나무드의 그림자가 길게 깔리면서 푸르름이 가시지 않은 땅은 적쇠에 그을은 스테이크 같았다 처 음엔 딸기나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 하우스 길게 뻗 친 허연 비닐 지붕인 줄 알았다 미안하다 눈 덮인 겨 울이면 땅의 탯줄처럼 한없이 늘어나 우리들 속옷 속 덜아문 배꼽까지 닿아 있던 강이며, 둘이서 담배 한 대 피우는 사이 풀풀풀 떡가루 같은 눈을 쓸어올리며 너는 방패연의 긴긴 꼬리처럼 단숨에 떠오를 것 같았 다 아니다 다시 칼바람 잦아들면 강은 눈썹 끝까지 옥양목 홑이불 끌어올리며 자던 어린 날의 늦잠이거나 내장이 다 터진 어떤 삶을 덮어 가리던 수의였다. 시,좋은글 2021.08.15
들찔레와 향기 - 오규원 사내애와 계집애가 둘이 마주보고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고 있다 오줌 줄기가 발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서로 오줌이 나오는 구멍을 보며 눈을 껌벅거린다 그래도 바람은 사내애와 계집애 사이 강물 소리를 내려놓고 간다 하늘 한켠에는 낮달이 버려지고 있고 들찔레 덩굴이 강아지처럼 땅바닥을 헤집고 있는 강변 플라스틱 트럭으로 흙을 나르며 놀던 시,좋은글 2021.08.15
리듬.2 - 김춘수 모과는 없고 모과나무만 서 있다 마지막 한 잎 강아지풀도 시들고 하늘 끝까지 저녁 노을이 깔리고 있다 하느님이 한 분 하느님이 또 한 분 이번에는 동쪽 언덕을 가고 있다 시,좋은글 2021.08.15
그리움이란 - 이정하 그리움이란 참 무거운 것이다 그리움이란 참 섬뜩한 것이다 무게도 없는 것이 나를 무겁게 짓눌러 기어이 가라앉게 만들므로 형체도 없는 것이 나를 휩싸고 돌아 기어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므로 그에 대한 원망보다 그리움이 깊다는 것은 참 무겁고도 섬뜩한 일이다 나는 없고 그대만 있다는 뜻이다 그대가 없는 삶은, 세상은 살맛이 없다는 뜻이다 시,좋은글 2021.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