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볍씨 말리는 길 - 고영민

소소한 소선생 2024. 8. 2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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볍씨 말리는 길 - 고영민

 

 

집밖을 나섰습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랗게 펴 말린 볍씨들이 가지런합니다.

햇살에선 오래된 볏집냄새가 풍기고 마을은 이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참 오랜만의 휴식입니다. 이런 날은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이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선 볍씨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런 볍씨 속에 들어있는 흰쌀, 영혼들.

나는 문득 저 길의 끝, 일년 내낸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정갈한 

저녁 밥상을 떠올립니다. 텅 빈 무논 한가운데 흰 백로가 허리를 구부려

마음 자락에 떨어진 이삭 하나를 줍습니다.

이 역시 소담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쌀밥입니다. 그림자를 길게 펼쳐놓고

출출한 햇살 한줄기가 볍씨 하나하나를 오랫동안 어루만집니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널어놓은 볍씨를 가래로 몰아 챙깁니다.

곧 이슬이 내릴 시간, 볍씨들은 노란 껍질을 여미고 하루 종일 데운

제 몸으로 저녁의 입구를 향해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숲을 향해 새떼들의 고삐를 쥐고 가는 노곤한 서녘하늘은 텅 비어

어둡고 이슥토록 노을 한자락은 허기진 산을 채 넘지 못해 , 

너머엔 아직 길이 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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