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볍씨 말리는 길 - 고영민
집밖을 나섰습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랗게 펴 말린 볍씨들이 가지런합니다.
햇살에선 오래된 볏집냄새가 풍기고 마을은 이제 편하게 쉬고 있습니다.
참 오랜만의 휴식입니다. 이런 날은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이 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선 볍씨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런 볍씨 속에 들어있는 흰쌀, 영혼들.
나는 문득 저 길의 끝, 일년 내낸 못물에 발목을 적시며 준비한 정갈한
저녁 밥상을 떠올립니다. 텅 빈 무논 한가운데 흰 백로가 허리를 구부려
마음 자락에 떨어진 이삭 하나를 줍습니다.
이 역시 소담하게 차려진 한 그릇의 쌀밥입니다. 그림자를 길게 펼쳐놓고
출출한 햇살 한줄기가 볍씨 하나하나를 오랫동안 어루만집니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널어놓은 볍씨를 가래로 몰아 챙깁니다.
곧 이슬이 내릴 시간, 볍씨들은 노란 껍질을 여미고 하루 종일 데운
제 몸으로 저녁의 입구를 향해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숲을 향해 새떼들의 고삐를 쥐고 가는 노곤한 서녘하늘은 텅 비어
어둡고 이슥토록 노을 한자락은 허기진 산을 채 넘지 못해 ,
너머엔 아직 길이 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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