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이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2024.8.6.화. 작가와의 만남- 제 15강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반응형
'시,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사람 - 정호승 (0) | 2024.08.11 |
---|---|
명동성당 - 정호승 (0) | 2024.08.11 |
창문 - 정호승 (0) | 2024.07.28 |
바닷가에 대하여 - 정호승 (0) | 2024.07.15 |
서울의 예수 - 정호승 (2) | 2024.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