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좋은글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소소한 소선생 2023. 8. 28. 09:49
반응형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한국의 명시>중에서

반응형

'시,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0) 2023.08.28
낙화 - 조지훈  (0) 2023.08.28
물컵의 신비 - 김경미  (0) 2023.08.27
무릎 - 정호승  (0) 2023.08.27
서울매미 - 박라연  (0) 2023.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