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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시집 5

돼지들에게 - 최영미

돼지들에게 -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허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속에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러 들어간 오두막에..

시,좋은글 2022.02.25

11월의 낙엽 - 최영미

11월의 낙엽 - 최영미 가을비에 젖은 아스팔트, 돌아보면, 떨어질 잎이 하나 남아 있었나. 천둥에 떨고 번개에 갈라진 잎사귀, 심심한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어 주고 종이보다 가벼운 몸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지키던 너. 허술한 나무가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의 운명에 순종했던, 상처투성이의 몸에 햇살이 닿으면 촘촘한 세월의 무늬가 드러나지만.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 누군가의 가슴바닥에 훅. 떨어졌으면...... 첫눈이 내려 무거운 눈을 매달고 허공에서 부숴지기 전에 순한 흙에 덮혀 잠들었으면...... 낙엽의 비문(碑文)을 읽을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시,좋은글 2022.02.25

마지막 여름장미- 토마스 무어

마지막 여름 장미 - 토마스 무어 마지막 여름 장미가 홀로 남아 피어 있네; 그대의 사랑스런 동무들은 모두 시들어 사라졌지 그대와 비슷한 꽃은 하나도 없고 그대의붉은 빛을 되받아 비추고 한숨에 한숨을 더할 꽃봉오리도 가까이 없네. ​ 그대 외로운 장미여! 나 그대가 홀로 줄기 위에서 시들게 두지 않으리, 사랑스런 벗들은 모두 잠들었으니, 가라, 그대도 그들과 함께 잠들게. 이렇게 나 그대의 이파리들을 다정하게 화단 위에 뿌리네. 그대의 동무들이 향기를 잃고 죽어 있는 정원에. ​ 나도 곧 그대를 뛰따르리니. 우정이 식고, 사랑의 빛나는 무리에서 보석들이 떨어져 나갈 때, 진실한 마음들이 시들고 좋은 이들이 사라져 없어지면 오! 이 살벌한 세상에서 누가 홀로 남아 살려고 할까? ​

시,좋은글 2022.02.18

마법의 시간 - 최영미

사랑의말은 유치할 수록 좋다 유치할수록 진실에 가깝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뜨거워찌 행복해찌 ​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너밖에 없찌. 그 말을 못해 너를 보내고 바디버터를 덕지덕지 바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마법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파 ​ 망고와 파파야 즙을 머리에 바르고 올리브오일로 마사지하고 싱그러운 페퍼먼트와 장미꽃 향으로 중년의 냄새를 덮고 어미의 병실에서 묻은 지저귀 냄새도 지우고 기다려찌 너밖에 없찌 ​

시,좋은글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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