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 그 너른 들에서 강윤후 나를 표시하는 몇 개의 숫자들과 더불어 산다 간혹 집 전화번호나 통장 비밀번호 같은 것을 잊고서 청어 대가리처럼 어리둥절해 한다 먼 도시의 지인들 사이에 떠도는 나에 대한 소문들을 듣기도 한다 소문에서 나는 무엇에 대단히 화가 나 있거나 누구를 아주 미워한다 행복한 가장이 되어 세월을 잊고 세상일마저 모른 채 지낸다고 한다 소문만으로도 내 근황이 충분하므로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듯 일없이 달력이나 넘겨본다 아무 징조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그러다 어느날 아침 출근하려는데 문득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 너른 들판 어디쯤에선가 나도 그렇게 시동이 꺼질 것이다 갑작스레 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