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붓꽃 이원규 울먹울먹 산중 오지마을의 논골 습지에 먹을 갈아놓고 남몰래 보랏빛 붓으로 한 획을 긋는데 각시여, 나의 각시여 일 년이 걸린다 해마다 제자리에서 자음 모음 열흘을 망설이다 마침내 꽃잎 하나 지우며 겨우 한 획의 편지를 쓰다 말고 내년 이맘때에야 다시 붓을 들리라 아무래도 나는 너무 자주 흘림체로 휘갈겼다 이 산 저 산 앉은뱅이 각시붓꽃들을 이어보면 무슨 글자가 될까 삼만 리를 걸어도 해독할 수 없다 그대 또한 깊은 봄밤의 두더지처럼 이불 속에서 돌아누우며 끄응 쉼표를 찍고 나 또한 지리산하 섬진강변에서 별똥별처럼 털썩 무릎을 꿇으며 한 획을 긋는다 각시여, 나의 각시여 대체 이 무슨 상형문자인가 고향 밖으로 떠돌며 이승 내내 울먹울먹 먹을 갈아도 끝끝내 못다 쓸 나의 족필(足筆) 한 자루..